어려서 공부를 늦게 시작한 덕에 공부에 대한 집중력 보다는 그 주변의 것들부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고1이 되고 처음 독서실에 가면서 제일 신경썼던 것이 필체였던 것 같다. 읽고 외는 게 싫으니 쓰는 거라도 흡족하게 했으면 해서였다. 글씨 쓰는 것에 노력을 하다 보니 문구류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요즘도 가끔 글씨가 잘 안 써지면 맘이 불편하다. 그런 탓에 어떤 펜을 쓸 때, 어떤 책상에서 쓸 때, 어떤 자세에서 쓸 때 글씨가 잘 써지는지에 대한 원리를 어렴풋이나마 파악하게 됐다. 대체로 딱딱한 바닥에 종이 한 장만 대고 쓰면 잘 써지지 않고 볼펜 보다는 잉크펜이 잘 써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보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글씨를 쓰는 팔꿈치가 공중에 떠 있을 때다. 습관이라 그런가 나는 팔꿈치가 책상에 닿아 안정감을 가져야 글씨가 잘 써진다.

 취직을 하고 소속감을 느끼는 게 팔꿈치를 대는 것과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팔꿈치가 소속이고 내가 글씨를 쓰는 손이라면 소속이 주는 안정감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다. 소속과 나를 과하게 동일시하면서 본질을 놓치거나 배타적이 되지 않는다면 소속이라는 건 굉장한 안정감을 준다. 취업을 준비하며 소속에 대한 갈망이 생겼기 때문에 지금 소속에 대한 만족을 과하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긴 하지만 그래도 정도가 다를지언정 순기능의 존재 자체가 흔들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25살 이후론 계속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이면 샤워를 하며 내가 상처를 주거나 실수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오늘은 이러지 말아야지'하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런 다짐은 삶 속에서 무산 되었던 적이 많다. 여기서 왜인가를 따라 올라가면 결핍과 상처가 있었던 탓이지 싶다. 내가 누굴 배려하거나 남의 조그만 잘못을 참을만큼의 여유가 없을 때, 샤워하며 한 다짐은 안 하니만 못한 것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여유를 가질 수 있을 때에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 지난 4년이었다.

 그러다보니 지금의 안정감과 소속감이 기쁘다. 동시에 자책으로 이어지는 잘못의 연속이었던 시간의 나의 깜냥이 너무 부족했던 것이 아쉽기도 하다. 주어진 상황에서도 내 스스로 여유를 만들어내어 따뜻하고 진중한 사람이 되고 싶던 목표를 언제즘 이룰 수 있을는지에 대한 막막함이 아직 남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팔꿈치를 붙이지 않아도 글씨를 잘 쓰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데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오랜만에 팔꿈치를 책상에 대면서 글씨를 쓸 때 느껴지는 안정감을 어딘가에 소속됨으로써 느끼는 것 같아 좋다.

 항상 더 나은 사람이고자 살아야겠다. 죽고나면 다 똑같은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살았던 동안에 더 나아지고자 몸부림치고 노력했던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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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의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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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미사를 다니는 중이다. 물론, 매일 가려던 다짐은 항상 눈을 뜨며 마주하는 7:20 이라는 시계를 보며 좌절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새벽에 일어나 취업을 하게 해주십사 기도를 드리러 간사한 마음으로 가는 것 같아 새벽미사를 가면서도 죄스럽기도 하다. 요즈음 새벽미사에는 첫영성체 교리를 받고 있는 초등학생들이 온다. 신부님의 강론 말씀도 그 아이들을 위해 해주시니 나에게도 딱 눈높이에 맞는 말씀을 듣는 것 같다 좋다. 

 오늘의 강론을 아이들에게 하시는 걸 듣는데 무슨 질문을 하실 때마다 '아니요~'라고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10살 정도의 녀석들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지겨운 미사를 드리려니 뿔이 난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이 생각을 하고 보니 나의 주일학교 선생님 7년이 머릿속에서 지나갔다. 

 주일학교 교사 생활의 첫 3년의 나는 미사시간에 떠드는 아이들을 미워했다. '미사 시간에는 조용해야 한다'는 당위를 강요했고 그래도 안 될 때에는 나무라려 했다. 그리고 조용히 시키지 못하는 나를 스스로 무능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렇게 시끄럽던 아이들도 고등학생만 되면 점잖게 미사를 드리는 것을 보고는 애즉에 그 중학생들을 40분씩이나 내 원한대로 통제한다는 것이 허상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그 나이엔 무슨 말을 한들 그들에겐 이해되고 행동을 바꿀만한 논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몇년 전부터 나의 신념인 것처럼 굳어진 생각이 한 가지 있는데 '사람은 엄청난 크기의 충격을 받지 않는 이상 정말로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삶의 과정에서 모두 예전에 들었던 '미사시간엔 조용히 해야지' 같은 당위적 논리가 이해되거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던지게 만드는 경험을 하기 마련인 듯하다. 결대로, 흐르듯이 살게 두면 언젠가는 깨달을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나이대에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의 메시지를 구태여 머릿속에 입력하고 원래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시간을 굳이 건너뛸 시도를 할 필요가 있는가 싶은 것이다.

 순간에 충실해야 깨달음의 기회도 온다는 것을 너무나도 크게 느낀다. 그렇지만 선배의 충고를 '꼰대의 지적질'로만 치부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이젠 조금씩 알 것도 같다. 그 충고에 휘둘리는 것도 문제지만 모든 충고를 부정하는 것도 현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취업전선에 있으면서, 대학생활이 마치 술에 취했던 것처럼 정신 없는 상태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굳이 시절을 돌이켜 바꾸고 싶은 생각은 이젠 들지 않는 것 같다. 지금의 나는 그런 방황(?)들로 만들어진 사람이고, 과거를 돌린다는 것도 애즉에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 고민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잘못은 잘못으로 철저히 뉘우치면 된다. 앞으로는 잘못을 저지르고서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이상적인 인간상을 만들고서 나를 깎아내거나 미워하고 부정하는 일은 멈출 수 있을만큼은 큰 것 같다. 성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침 공기를 마시며 묘한 삶의 자신감을 얻었다. 항상 조심하되 당당하게 살아가야겠다. 물 흐르듯이 내 삶의 결대로.

마무리는 Dwight quotes는 아니지만 FALSE meme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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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16, 2016

카테고리 없음 2018. 1. 11. 23:33

무한도전을 보다가 엄마한테 이런 말을 건넸다. 
"엄마 쟤넨 젝스키스 모르겠다. 은퇴하고 태어난 애들이잖아."

아이들의 표정도 이해가 됐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누군가 잊혀진 계절을 부른 이용의 무대를 보여줬다면 노래는 어렴풋이 알았던들 그의 얼굴마저 알아보진 못했을 테니까. 


성당에서 교사들끼리 이야기하던 중 20학번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10학번이다. 학번이 1로 시작할 수도 있냐던 선배들의 말은 그대로 내 입에서 학번이 2로도 시작할 수 있냐는 말이 되어 나온다. 


대치역 앞 스타벅스에서 밖을 보는데 '플러스'라고 쓰여진 슬리퍼를 신은 아이들 무리를 발견했다. 내가 다니던 플러스 독서실 슬리퍼다. 푹신한 슬리퍼의 발등엔 화이트로 거칠게 '플러스' 라고 쓰여 있었다. 지금도 똑같구나. 


이제서 조금씩 다른 세대에 대해서 이해가 되는 듯도 하다. 젝스키스를 모르는 아이들은 이용을 몰랐던 그 예전의 나고 2로 시작하는 학번을 가질 사람들도 학번이 1로 시작할 수도 있냐는 소리를 듣던 나요, 플러스 독서실 슬리퍼를 신고 있던 아이들도 그 옛날 독서실 다니던 나다. 다르게 보면 매봉역에서 벌개진 얼굴로 서로가 탈 택시를 잡아주며 귀가하시는 아저씨들도 나일테고 자식의 손을 잡고 빵을 사러 오시는 아저씨도 나일 테고 말없이 양재천을 걸으시는 노부부도 나일테다. 


사람들은 다 자신이 태어난 시점에서 자신의 삶을 산다. 어느 시절에 어렸건, 젊었건, 나이 먹어가건 간에 다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걸 어처구니 없게도 최근에서야 조금씩 깨닫고 있다. 전엔 다른 세대를 게임 NPC처럼 여겼었다. 이제사 사람으로 보이게 되는 건 나의 어리석음 탓이다...


존중은 그래서 해야 하는 것이구나. 닳고 닳도록 들은 그 흔해빠진 단어의 무게를 처음 제대로 느끼고 있다. 하하 내일이 시험이라 그런가보다. 막학기는 마치 구름위를 걷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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